책이야기

킬리만자로의 눈 - 어니스트 헤밍웨이

underline 2010. 1. 29.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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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는 높이 1만9천7백10피트의 눈으로 뒤덮인 산으로서 아프리카의 가장 높은 봉우리다. 서쪽 산마루는 마사이어로 죽음의 집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그 서쪽의 산꼭대기에 말라비틀어지고 얼어붙은 한 마리 표범의 시체가 누워있다. 그렇게 높은 곳까지 그 표범이 무엇을 찾으려고 왔는지 이제껏 아무도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다.’

한 마리의 표범이 무엇을 위해서 그곳으로 향하였고 죽음을 맞이 했는지 아무도 알수가 없다. 사람들도 똑같이 무엇을 위해서 그 높은 곳을 향하여 달려 가는지 아무도 설명할 수가 없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삶의 흔적만을 남기는것이다. 다만 이해할수 없다고 해서 이유가 없는것은 아닐것이다.

과연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때 어떠한 감정을 느끼는걸까? 흐느끼고 울부짖을 건가? 아니면 해리와 같이 촛불을 깜빡깜빡 흔들리게 만들고 불길을 야금야금 태우는 바람처럼 슬그머니 찾아오는 것일까?

주인공 해리는 사냥을 나왔다가 생긴 상처로 인하여 외딴 오두막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을 앞선 그에게는 과거의 일들이 회상되어 진다. 자기가 경험한 여러 가지 소재들에 대하여 언젠가는 글로 쓰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들이 완벽히 이해될 때까지 미룬다. 하지만 안락함을 추구하며 쓰지않고 안일하게 지내면서 스스로를 경멸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나날들이 그의 재능을 둔화시키고 자신을 경멸하며 일할 의욕마저 상실시켜 버린다. 자신과 같이 있는 모든걸 희생하는 여자 속에 파묻혀 그 여자의 탓으로 돌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의 문제임을 깨닫는다. 다만 그여자에서 사랑한다는 거짓말을 하는것만이 그녀에서 최선을 다하는 길임을 안다.

왜 쓰지 못했는가? 에 대한 진실, 끔찍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 그것을 받아들인 순간 그것에 개의치 않는다. 지금 후회되는 인생이라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기꺼이 책임을 져야한다. 현재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제 죽음이 다가왔다. 죽음에도 개의치 않는다. 다만 고통이 문제될 뿐, 그러나 지금 정도의 고통은 걱정할 만큼은 아니다.

주인공은 자기를 구하러 온 비행기를 타고 구조되는 꿈을 꾸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 비행기는 킬리만자로의 정상으로 방향을 돌리고 그곳을 내려다 보면서 자신의 종착역임을 깨닫는다. 왜 하필 죽음과 자신을 구하러 온 비행기가 서로 대비되는것일까? 비행기는 다시 삶을 되찾게 해주는 도구인데 죽음을 향해 날라 가는것일까? 주인공의 진정한 구조는 죽음으로 그곳에서 평온을 되찾는 것일까? 자신의 재능을 발휘 못하고 자신을 속이면서 그럭저럭 삶을 유지하는것은 이미 죽은것가 다름 없는것인가? 아직 죽는다는것에 대하여 생각해 본적이 없다.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지만 먼 언저리에서 어렴풋이 머릿속에 작가의 생각을 공유할수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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